저가 와인이 가성비 와인이 아닌 이유 — 라벨이 말하지 않는 것들

‘정성을 들였다’는 말, 어떠신가요.

‘정성’에는 노력도 수고도 마음도 담겨 있어 소중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에 들어가는 정성이라면 더욱 가치있겠죠.

우리는 편의를 위해 대량으로 가공된 음식보다, 만든 이의 손길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의 소중함을 압니다.

마트 진열대에 올려진 된장찌개 한 팩과 골목 끝 작은 식당에서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끓여내신 된장찌개 한 그릇이 있다면, 당연히 할머니의 음식을 선택합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량 생산으로 유통과 가격 효율성에 집중하는 저가 와인도 있고, 생산자의 철학과 인내, 즉 정성이 담겨 생산되는 와인들도 있습니다.

대량 생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효율성’을 위해서 필연적인 ‘저가’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가 와인은 왜 저렴할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저가 와인이 진짜 가성비 와인이 될 수 있을까요?

와인 잔 속의 착각

저가의 대량 와인 산업 현장에선, 우수 와인들이 갖는 좋은 특성들을 흉내내는 것이  화학적으로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가 와인들은, 그 맛의 기본을 유지하기 위해 와인 양조 공정에서 일반 와인 애호가들이 생각지 못하는 다양한 첨가물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메가 퍼플(Mega Purple)입니다. 메가 퍼플은 화학제품은 아닌 걸쭉한 포도 과즙 농축액으로, 와인 색을 짙게 만들고, 거친 타닌을 부드럽게 깎아내며, 잘 익은 과일 향으로 와인을 교정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는 시각적인 부분뿐 아니라 입안의 질감과 맛까지 바꾸어 놓기 때문에, 미각을 속이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됩니다. 땀 흘려 포도를 알맞게 키우는 수고와 인내 대신,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보정하듯 와인의 부족함을 보정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되는 셈입니다.

포도액에 더해, 오크(oak) 관련 보정도 사용됩니다.

와인을 오크통에서 발효하거나 숙성하는 것은, 사실 생산자가 감당해야 할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선택 중 하나입니다. 뉴 프렌치 오크통 하나의 가격은 약 100만 원에서 400만 원을 훌쩍 넘는데, 통 하나에 담기는 와인은 고작 300병 남짓입니다.

수십만 병을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어야 하는 산업적 규모에서는 도저히 타당성이 나오지 않는 계산이 되겠죠.

와인에서 우드 향이 느껴지게 하면서도 막대한 오크통 비용은 절감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와인 생산자들이 찾아낸 대체품은, 오크 판(staves), 잘게 부숴진 오크 칩이나 파우더, 오크 추출액 등입니다.

병당 150원에서 300원 정도면 가능한 오크 칩을 나일론 망에 담아 대형 스테인리스 탱크 안에 넣기도 하고, 혹은 병입 직전에 액상 오크 추출액을 첨가하는 방법등이 사용됩니다.

이런 방법들은 모두 바닐라, 토스트, 약간의 스파이스 같은, 오크통 숙성의 표면적인 향은 재현할 수 있지만,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지는 향은 당연히 원래의 오크통 숙성 과정 자체를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thousands of barrels stacked in a cellar at a winery, 와이너리 셀러에 쌓아 올려진 오크 배럴들
스페인 로페즈 데 헤레디아 와이너리의 웅장한 수제 오크통 저장고 © VinFloria

셀러가 말해주는 것들

와인들이 숙성되고 있는 셀러를 방문해보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더욱 확연히 느껴집니다.

셀러 안에 담긴 서늘하고 찬 기운, 습기를 머금은 공기, 빛이 겨우 닿는 어둠 속엔 셀러에는 우드통이 있기도, 스테인레스 스틸 통이 사용되기도, 콘크리트 통들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각각의 통들에는 이유가 있고 의도된 와인 스타일이 있다면 그 와인에 맞게 선택되어 사용됩니다. 무언가를 흉내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셀러의 고요한 공간에 줄지어 쌓아올려진 오크통들. 그 안의 와인은 나무결의 틈새를 통해 유입되는 산소를 만나며 천천히, 자신만의 느린 속도로 와인 자신이 되어갑니다.

그 조용한 셀러의 정적 속에서 와인들은, 잘게 부셔서 던져진 오크칩이나 오크 추출액 몇 방울로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향과 맛을 층층이 담아가게 됩니다.

하나는 인내의 결과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인내를 간편하게 포장해낸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산물입니다.

테루아 — 땅이 맛이 되는 방식

테루아(Terroir)는 한 마디로 쉽게 번역되지 않는 프랑스어입니다. 어떤 환경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철학 — 토양의 구성, 언덕의 경사, 햇살의 각도, 저녁에 밀려드는 서늘한 해풍까지.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잔의 와인 안에 담긴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북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어 자주 들르게 되는 곳이 나파 밸리와 소노마 밸리입니다.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 위치한 포도밭들을 가 보면, 낮 시간은 포도가 익기에 충분히 온도가 높고 밤은 서늘한 기온을 보여줍니다.

이곳에서 나파의 메인 토양중 하나인 화산토를 딛고 자라는 포도 나무들은 각각의 포도 한 송이에 모든 환경을 치열할 만큼 담아내고, 그것이 그대로 잔 안에서 표현됩니다.

단단한 구조감, 겹겹이 쌓인 레이어, 검은 과실 향, 묵직한 타닌, 그리고 마지막 모금 이후에도 오랫동안 맴도는 피니시에 이르기까지.

그런가하면, 나파와 산맥을 두고 서쪽으로 위치한 소노마는 전혀 다른 산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태평양 안개가 더 가까이 밀려오고, 토양은 척박하여 포도의 개성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냅니다.

소노마에서도 나파와 같은 카베르네 소비뇽이 생산되지만 이곳의 카베르네는 더 조용하고, 더 흙냄새가 배어나며, 좀 더 온화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같은 품종, 같은 캘리포니아지만,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와인들은 둘 다 충분히 즐겨 볼 가치가 있죠.

어디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는 맛 — 저가 와인이 가성비 와인으로 불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가격표 속 가격 — 저가 와인의 진실

저가 와인의 가격 구조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와인 한 병에 포함되는 포장재, 운송비, 유통 마진, 마케팅 비용등을 모두 제하고 나면, 저가 와인 한병에 실제로 담긴 와인 원액의 가치는 몇백 원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유리병, 라벨, 포일 캡슐, 코르크까지 모든 포장 비용이 먼저 더해집니다. 여기에 생산자, 수입사, 유통사, 소매점을 거치며 각 단계마다 마진이 모두 더해지고 나면, 실제로 와인 자체를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은 말도 안될 정도의 작은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량 산업화 저가 와인을 산 경우, 결국 우리가 지불하는 돈의 대부분은 와인에 대한 가격이 아니라, 와인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가격이 됩니다.

장인정신 — 포도밭에서 시작되는 차이

정성이 담긴 와인과 효율성을 위해 생산된 와인은, 와인 병이 채워지기 훨씬 전, 포도밭에서 포도가 자라는 상태일 때부터 이미 차이가 생겨납니다.

최대한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여러개의 포도 송이가 달려있는 나무와, 엄격하게 솎아내어 단 몇 송이만 남긴 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 그루에서 자란 포도가 같은 품질을 보일 수 있을까요. 수확량이 많아질수록 각 포도알에 담기는 미네랄도, 당분도, 개성도 희석됩니다.

수익을 추구해야하는 관점에서 수확량을 낮게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와인 산지에는 과감히 수확량을 낮추는 생산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결정은 포도밭이 지켜져야될 자격이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생산자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포도알 안에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수확하는 일 또한, 포도밭에서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새벽부터 한 송이씩 손으로 수확하고, 덜 익거나 손상된 포도들을 골라내는 일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속도가 더디고, 힘든 작업이며, 드러나지도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품질에 헌신하는 생산자에게 그런 어렵고 더딘 과정들은 그저 당연히 해야하는 일의 한 부분이 됩니다.

이렇게 재배되고 생산되는 와인들은 무언가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대체제를 이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연히 원래 와인이 만들어져야 하는 과정대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저가 와인과 가성비 와인이 보여주는 큰 차이중 하나입니다.

첫 모금, 그 너머

산업화된 저가의 대량 생산 와인은 단지 몇초 안에 인상을 남기도록 만들어집니다.

시음 테이블에서 소비자가 잔을 바라보는 시간이 딱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크고, 즉각적이며, 일차원적입니다. 한번에 왔다가 이내 멈춥니다.

하지만 정성과 수고가 담긴 와인은 이와 다릅니다. 이런 와인들은 겹겹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비 온 뒤 젖은 돌의 향, 말린 허브의 은은한 속삭임, 조용한 흙냄새.. 서로 시차를 두고 다가오며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첫 잔과 마지막 잔 사이에서 와인이 어떻게 변하는가도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부드러워지고, 열리며,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내는지.

크고 거칠게 소리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여전히 무언가를 건네옵니다. 저가 와인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경험이죠.

이런 향과 맛의 결은 정성과 수고로 만들어진 와인에서만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빠른 길이 있었음에도 굳이 느린 길을 선택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옳은 길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들이 있기에.

저가 와인이 아닌 가성비 와인 고르기

저가 와인이 왜 저렴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저가 와인과 차별되는 가성비 와인을 고를 때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와인병에 둘러진 와인 라벨은 생각보다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원산지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어떤 와인을 살까 와인 코너에서 고민중이라면, 와인 라벨에서 가장 먼저 원산지 표시를 살펴보세요.

원산지 범위가 좁아질수록, 와인이 품은 이야기는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예를들어, 그저 ‘California’라고만 적힌 와인은 그 광활한 땅 어딘가에서 모아진 포도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도 ‘Napa Valley’라고 써있다면 그만큼 범위가 좁혀지게 되고, 나파 밸리에서도 ‘Oakville’이나 ‘Rutherford’ 같은 마을 범위까지 내려오면 잔 속에는 훨씬 밀도 높은 테루아(Terroir)의 이야기가 담기겠죠.

마을에서도 더 좁혀져 특정 포도밭(Single Vineyard) 이름이 적혀 있다면 어떨까요. 다른 포도와 섞지 않고 오직 그 밭의 결실만으로 승부하겠다는 생산자의 철학을 보여주겠죠.

물론 특정 포도밭 와인이 반드시 훌륭한 품질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량의 저가 와인을 생산하는 생산자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유럽 와인에서는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생산자들이 엄격한 지역 규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한, 더 넓은 범주의 원산지 표기를 선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원산지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잔 안의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고 깊어진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뒷면 라벨이 말해주는 것

뒷면 라벨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예를 들어, ‘Aged 12 months in French Oak(프렌치 오크통 12개월 숙성)’, 이런 짧은 문장 하나는 이 병 속에 값싼 오크 칩 대신 생산자의 인내와 비용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Unoaked’ 또는 ‘Stainless Steel 발효/숙성’ 이라고 적힌 와인이라면, 신선한 과실 향과 산도를 살리기 위한 생산자의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의 이유가 담겨 있다면, 그것은 좋은 와인의 증거입니다.

생산자가 기른 포도로 와인 병입까지 마쳤다는 용어도 찾아보세요.

‘Mis en Bouteille au Domaine’, ‘Mis en Bouteille au Château’, Estate grown & bottled 등은, 중간 유통상이나 대형 공장이 포도를 사 와서 만든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자신의 포도밭에서 직접 기르고 수확해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병입까지 끝냈다는 뜻입니다.

거품이 덜한 산지

꼭 이름난 유명 산지일 필요는 없습니다. 브랜드 값이 가격에 거품으로 얹히지 않는 곳에서 주로 찾아보면 좋습니다:

프랑스 루아르 밸리의 시농(Chinon), 론 밸리의 코트 뒤 론 빌라쥬(Côtes du Rhône Villages), 부르고뉴의 코트 샬로네즈 (Côte Chalonnaise),

보르도의 프롱사크(Fronsac),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의 올드 바인(Old Vine),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랑게 네비올로(Langhe Nebbiolo), 바르베라 다스티(Barbera d’Asti), 토스카나의 로쏘 디 몬탈치노(Rosso di Montalcino), 마렘마 토스카나(Maremma Toscana),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초(Montepulciano d’Abruzzo), 마르케의 베르디키오(Verdicchio dei Castelli di Jesi),

스페인의 비에르소(Bierzo),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리아스 바이샤스(Rías Baixas),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Burgenland), 칠레의 마이포 밸리(Maipo Valley), 아르헨티나의 우코 밸리(Uco Valley) 등.

인지도는 낮을지 몰라도, 새벽부터 손수 포도를 수확하는 고집스러운 생산자들의 진심이 그곳에 있습니다. 더 빠르고 편한 길이 있는데도, 굳이 새벽같이 일어나 기다림을 감내하며 가장 느린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고집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에 와인 코너 앞에 서게 된다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낯선 이름이나 처음 보는 지역들을 라벨에서 찾아보세요.

그 몇 분의 여유 속에서 와인 한 병은, 어느 언덕의 풍경, 어느 해의 뜨거웠던 여름, 포도를 정성껏 골라낸 누군가의 손길로 이어가며 세상을 향해 열리는 작은 문이 될 것입니다.

저가 와인과 가성비 와인은 같은 단어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가성비란, 지불한 금액 그 이상의 만족을 얻는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나에게 좋은 와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와인은 늘, ‘정성과 수고’가 들어간 와인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무엇을 필요로 하진 않습니다. 좀더 나은 것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 수고와 신념이라는 가치로움이 담긴 그 무엇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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