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흙 위에서 뛰어놉니다.
손가락으로 땅을 파고, 흙 한 줌을 쥐어 햇빛에 비춰보다 까르르 웃기도 합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흙을 콩콩 파기도, 툭툭 다독이기도 하면서, 플라스틱 장난감을 갖고 놀 때와는 다른 얼굴로 행복해 합니다.
흙이 기쁨을 준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본능일지 모릅니다. 발 아래의 땅이 단순한 지면이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있는 무언가라는 것, 그러므로 지켜야 할 소중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왠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흙이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라면, 오늘 우리가 밟은 이 땅은 다음 세대에도, 그 다음 세대에도 똑같이 살아있어야겠죠.
그 믿음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곳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 와인 한 잔 안에서.
웰빙 라이프스타일과 친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추럴 와인과 유기농 와인을 찾는 분들도 부쩍 늘었습니다. 내추럴 와인의 시작점에는 어떤 친환경의 모습이 있을까요?
유기농·비오디나미크·친환경이라는 이름의 선한 신념들이, 왜 와인의 점수나 레이블, 가격표보다 훨씬 더 중요한지, 우리가 아는 그 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추럴 와인의 뿌리 — 포도나무 아래 숨겨진 건축물
우수한 와인이 만들어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포도 품종, 빈티지, 생산자 이름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포도나무 아래, 깊은 땅 속에서 시작됩니다.
건강한 포도밭 토양은 하나의 복잡한 생태계를 이룹니다. 미생물, 지렁이, 토착 효모, 자생 풀류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미네랄을 활성화하고, 그 에너지를 포도나무의 줄기로, 포도알 하나하나로 조용히 전달합니다.
건강한 흙 한 스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미생물이 산다고 하죠. 이들이 쌓이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그 생태계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 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남부 론 지방의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르나슈(Grenache) 와인을 좋아해서 남부 론밸리 와인 산지를 여행하던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풍경만이 아니었어요. 포도나무 자체였습니다.
땅에 바짝 엎드린 채 뒤틀리고 주름진, 굵고 거친 줄기들. 마치 선사시대 유적처럼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었습니다. 수령이 백 년을 넘는 것들도 많아서, 그곳에서는 50년 수령의 포도나무를 ‘어리다’고 부를 정도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석회암을, 점토를, 여러 지층을 뚫고 내려갔을 그 뿌리들은, 지나온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통과한 미네랄의 층, 수많은 유기체들이 살아 숨 쉬는 토양 환경 하나하나는, 뿌리에서 줄기로, 가지로, 포도알 안으로 흔적을 남기고 — 마침내 우리가 마주하는 와인 글래스 안에까지 담깁니다.
프랑스인들이 테루아(Terroir)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입니다. 어떤 레시피로도 복제할 수 없는, 환경이 가진 고유한 언어.
그리고 그 언어의 첫 문장은 언제나 살아있는 흙에서 시작됩니다.
내추럴 와인이 시작되는 곳 — 유기농, 비오디나미크, 친환경의 철학
내추럴 와인이 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더 깊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와인의 여정은 반드시 건강한 토양을 가진 포도밭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유기농·비오디나미크·친환경의 철학입니다.
비오디나미크(Biodynamique/Biodynamic) 농법은 신비로운 면이 있어 많은 분들이 궁금해합니다.
이 농법은 달의 주기, 즉 음력을 따라 가지치기부터 추수까지 일 년의 포도 농사 시기를, 그리고 착즙에서 병입에 이르는 양조 시기까지 조율합니다.
자연 식물로 천연 비료를 만들고, 하나의 농장을 완전한 자급자족 생태계로 운영하며 포도 재배에서 와인 양조까지 이어가는 방식이에요. 이렇게 와인 한 병을 완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진정한 신념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심오한 헌신이고, 그렇게 태어난 와인에는 그 순수한 과정만큼이나 순수한 향이 담깁니다.
유기농 농법은 합성 농약과 화학 비료를 배제합니다. 더 넓은 시각을 취하는 친환경 농법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물 사용을 줄이고,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며, 다음 세대도 같은 땅에서 농사지을 수 있도록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 방식은 그저 이름만 다른 마케팅 문구가 아니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 선택이며, 시장이 가격으로 보상해주지 않더라도 훨씬 더 많은 인내심으로 농사짓겠다는 조금씩 다른 모습의 결심들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핵심은 결국 같습니다.
생산자가 토양과 포도나무를 강제로 조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때, 토양은 스스로 회복력을 갖고, 포도나무는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가며, 수확기의 포도에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담긴다는 믿음입니다.
더 넣으려 하지 말라. 더 많이 관찰하라. 땅과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라.
이런 신념으로 포도가 재배되면, 양조 과정에서 와인메이커의 역할은 복잡한 계산을 하기보다는 더 단순해지고,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정직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길러진 포도를 신뢰하고, 스스로 와인이 되어갈 수 있도록 잠시 물러서는 것이죠.
좋은 와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와인이 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입니다.
비켜서는 것도 기술이다
플로랄 디자인과 와인 양조, 이 두 세계에서 내가 항상 느끼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꽃 작업을 할 때 혹은 꽃 작품을 감상할 때 기억에 남는 꽃은, 늘 가득 차거나 풍성하거나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시들지않은 건강한 꽃을 사용해서, 색감과 질감등의 디자인 요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고, 사이사이의 빈 공간조차 의미를 가진 작품들에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와인도 같은 원칙을 보여줍니다.
잘 가꿔진 토양에서 건강하게 수확된 포도는, 양조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향을 위해 선별된 특정한 배양 효모도, 밸런스를 잃은 포도를 보정하기 위한 산 첨가도, 포도 자체가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메우는 향미 조정제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글래스에 담긴 와인은, 포도밭이 실제로 만들어낸 그대로입니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최소한으로 손이 닿아 만들어진 와인.
이런 와인은 때론 처음부터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코르크를 여는 순간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려보세요. 조금 따라서 잔 안에서 숨을 쉬게 두고, 잠시 후 다시 입에 머금어 보세요. 첫 모금보다 세 번째 모금이 어떻게 더 흥미로워지는지, 끝났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어떤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이 계속 펼쳐지는지 느껴보세요.
와인과 공기 사이의 그 느린 대화, 그 조용한 전개는, 인간과 기계 문명이 과도하게 개입된 와인은 좀처럼 보여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잔이 비워진 뒤에도 계속 말을 건네오는 와인, 양조자가 한발 물러섰을 때 만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말해주는 것
친환경 농업 철학이 정말 와인 안에 반영되는가? 좋은 와인은 그저 농사를 잘한 결과일 뿐, 자연을 존중하는 농법이란 그저 이야기에 불과한건 아닌지?
의구심에서 비롯된 이런 회의적인 질문은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와인이 직접 말해줍니다.
전문가들이 진행한 여러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비오디나미크 와인과 일반 와인을 비교한 결과는 일관되게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전체적인 품질에서만이 아니라, 향, 맛, 질감에서, 비오디나미크 와인이 그 산지를 선명하게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들만 같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고뉴와 알자스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존경받는 생산자들 상당수가 오래 전부터 같은 신념을 지켜 왔습니다.
트렌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할 수 밖에 없는 증거가 바로 그들 자신의 토양 안에, 그들 자신의 와인잔 안에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포도밭들을 걷고, 셀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 와인들을 직접 마셔보면서, 자연이 존중받을 때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믿음 또한 확신이 되어 왔습니다.
내추럴 와인·유기농·친환경, 어떻게 고를까
그렇다면 와인 코너에서 와인을 고를 때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유기농이나 비오디나미크 인증을 하나하나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와인을 고를 때 단 하나의 질문만 하면 됩니다. 이 와인의 포도는 어떻게 자랐는가?
라벨에서 Organic, Biodynamic, Sustainable 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세요. 이 단어들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신호입니다.
산업적 측면에서 해왔던 방식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였다는 의미이자, 자연을 깊이 신뢰하고 존중하며, 토양을 건강하게 지키는 농사를 지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라벨이 사실 전부는 아닙니다. 친환경 농법을 하는 포도밭들 중 상당수는 공식 인증 마크가 없기도 합니다. 인증 절차는 비용이 많이 들기에, 많은 생산자들은 실제로 친환경 농법을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더라도 서류 절차를 밟지 않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와인 업계는 이들을 ‘실질적 유기농(practicing organic)’ 또는 ‘실질적 비오디나미크(practicing biodynamic)’ 생산자라 부릅니다. 신념과 철학은 그들 포도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서류 절차를 포기한것 뿐이죠.
와인 라벨 너머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와인 샾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관심있는 와인이 있다면 그 생산자에 대해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떤 신념을 가지고 포도를 재배하는지 물어볼 때, 와인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답을 알고 있고, 그 질문을 반가와 할 것입니다.
직접 찾아보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 생산자 웹사이트를 잠시 탐색해 보세요. 토양 건강, 자생 풀류, 셀러에서의 최소 개입(soil health, cover crops, minimal intervention), 이런 용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진심을 기울이는 생산자가 만든 와인이라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농법들은 비용이 더 듭니다. 수확량은 더 적고, 노동력은 훨씬 더 많이 들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정성껏 만들어진 이 한 병이 와인 코너에서 가장 저렴한 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와인 잔 안에서의 값어치는 이미 충분합니다.
*이 글도 참고하세요: [저가 와인이 가성비 와인이 아닌 이유 — 라벨이 말하지 않는 것들 ]
유기농·비오디나미크·내추럴 와인, 어떤 맛일까
유기농·비오디나미크·내추럴 와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순수함(purity)’ 입니다.
와인의 순수함이란, 포도가 어디서 자랐고 어떻게 돌봐졌는지를 말해주는, 맑고 꾸밈없는 명료함입니다. 과일향은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산도는 날카롭거나 인위적이지 않고, 밝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질감이 있는 미네랄은 토양으로부터 바로 전해지는 듯 하고, 그 너머에는 생생한 활기가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와인들은 어느 한 요소가 도드라지지 않고 고요한 균형을 이룹니다. 알코올은 타오르지 않고, 타닌은 압도적으로 조여오지 않으며, 피니쉬는 갑자기 툭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언제 멈춰야 할지도 아는 사람이 만든 요리처럼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물론 와인마다 조금씩 다르고 사람마다 입맛도 다르지만, 내가 다시 찾게 되는 와인들, 잔이 비워진 뒤에도 잔상이 오래 남는 와인들에는 언제나 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순수함, 생생함, 조용한 균형미.
이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선택한 취향이라기보다, 내 마음을 붙잡는 와인들을 만나게되며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 하나의 흥미로운 패턴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을 들여다보면 답은 늘 같은 곳으로 이어졌습니다. 땅을 억지로 조정하려는 대신 그 땅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임을 선택한 포도밭들로.
다음 세대의 포도밭으로 이어질 선한 철학
‘친환경’이나 ‘자연주의’라는 말은 요즘 어디서나 흔히 들리는, 어쩌면 마케팅을 위해 조금은 가볍게 소비되는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와인 산지에서 이 말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50년 뒤에도 이 흙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인가?” 라는 실제적인 물음입니다.
이것은 바로 눈앞의 수확량 그 너머를 바라보는 질문이 됩니다. 당장의 현재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위해 농사짓겠다는 신념이 없다면, 결코 그 진정한 답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농부들은 조금 특별한 사람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자신은 그 나무 그늘 아래 앉게되지 못할지라도, 정성껏 나무를 심고, 훗날의 자손들이 건강한 토양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정성껏 돌봅니다.
당장 내놓을 와인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가치에 헌신하는 것, 그 곳에는 숭고한 존엄이 깃들어 있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선한 의도로 만들어진 와인을 선택할 때,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서사의 일부가 됩니다. 지극히 작은 선택일지 모르나, 의미 있는 실천일 것입니다.
그저 포도밭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에 대한 숭고한 가치입니다.
*VinFloria/방플로리아 — 와인 교육자, 작가, 플로럴 디자이너. 캘리포니아에서 세계 와인산지로 여행하며 와인과 꽃,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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