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에서 마시는 와인은 왜 더 맛있을까?

정말 완벽한 오후였다.

테라스 주위로 가득 펼쳐진 포도밭, 아름다운 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포도알들, 그리고 내 앞에 놓였던 맛있는 와인들.

와이너리에서의 와인 테이스팅,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테이스팅을 마치고 나오면서 맘에 들었던 와인을 두세병 기쁜 마음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때의 설렘을 안고 집에서 같은 와인을 열었다. 역시 좋은 와인이다. 그런데 뭔가, 그날 그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에서 나를 감동시켰던 그 맛은 아니다.

왜지? 내가 잘못 느꼈던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걸까?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 전통 오크 숙성 배럴을 배경으로 놓인 레드 와인 잔들
나파밸리 세인트 헬레나에 자리한 하이츠 셀러(Heitz Cellar) 홈 랜치에서의 와인 테이스팅 | Photo © VinFloria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공간 속으로

감각 의학 연구자들이 ‘프로방스 로제 패러독스(Provençal Rosé Paradox)’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다.

프로방스의 환한 햇살이 가득한 와이너리 테라스에서 마셨을 때는 훌륭했던 와인이, 집에서 같은 와인을 마셨을 때는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타이틀까지 붙여진 연구가 있을 정도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일 것이다.

좋은 와이너리는 단순히 와인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공간도 그에 맞춰 설계한다.

그리고 그 공간의 경험은 와이너리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올리브나무가 늘어선 진입로, 테라스 가장자리를 수놓은 라벤더, 석조 아치 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포도밭 전경. 이 중 우연히 만들어진 풍경은 하나도 없다.

테이스팅을 위해 자리에 앉기 전, 방문객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워낼 수 있게 해줄 모든 디테일들이 이미 공간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맛을 독립적인 정보로 처리하지 않는다. 주변의 나무, 꽃, 공기, 건축물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끊임없이 단서를 얻는다. 결국 와이너리에서의 와인 테이스팅은 잘 설계된 다감각적(multi-sensory) 경험이며, 공간은 완벽한 테이스팅을 위한 서사의 첫 막을 여는 오프닝인 셈이다.

보이지 않는 준비

좋은 와이너리들이라면 테이스팅을 위해, 방문객이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몇 가지의 준비 작업을 한다.

그날 테이스팅 코스에 오를 와인들을 점검하고, 알맞은 서빙 온도가 되도록 준비해둔다.

조금만 온도가 높아도 알코올이 더 도드라지는 레드 와인, 너무 차갑게 칠링되어 향이 닫혀버릴 수 있는 화이트 와인, 단 몇 도의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와인은 자신이 가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닌이 강한 아직 영한 레드 와인의 경우, 한 가지 준비 단계가 더 추가되기도 한다.

와인을 깨끗한 디캔터에 옮겨 담은 뒤, 디캔팅한 와인을 다시 와인병에 담는 ‘더블 디캔팅(Double decanting)’ 과정이다. 공기와의 이 두 번의 접촉을 통해, 어린 와인은 그 향과 맛을 더욱 아름답게 펼쳐낼 수 있게 된다.

잔을 준비하는 과정도 있다. 테이스팅할 와인에 알맞는 잔을 선별해두고, 그 청결도를 점검한다.

피노 누아를 위해선 넓은 볼(bowl) 형태의 잔을 선택해 그 섬세한 향을 풍성하게 깨워낼 수 있게 하고, 까베르네를 위해선 좁고 높은 잔을 선택해 타닌은 좀더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며 강한 알코올은 코끝에 닿기 전에 좀더 날아가도록 돕는다.

와인의 향을 방해할 수 있는 미세한 세제 잔여물을 없애기 위해, 모든 잔은 스팀 소독을 거쳐 먼지가 날리지 않는 리넨 천으로 반짝이게 닦아 테이블에 올려진다.

잔 옆에 놓여지는 간단한 크래커나 치즈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짠맛이 없는 크래커는 혀의 감각이 와인의 여러 향과 맛으로 인해 무뎌지지 않도록 중화시켜주고, 타닌이 강한 레드 와인 곁에 놓인 부드러운 치즈는 와인의 거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주는 역할을 한다.

방문객이 자리에 앉아 와인을 맛 볼 시간이 되면, 눈에 띄지 않는 이런 모든 디테일들이 다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 테이블, 모양이 다른 와인 글래스에 채워진 무가의 와인들이 와인병과 함께 테이블에 놓여져있다.
완벽한 테이스팅을 위해 와인마다 각기 다른 글라스에 채워져 제공되는 스페인 리오하의 무가(Muga)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 룸. | Photo © VinFloria

이야기라는 마법

와이너리들에선 테이스팅에 앞서 때론 포도밭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곳에서 얇게 덮인 흙 아래로 돌이 가득한 토양을 볼 수도 있고, 물을 찾아 깊은 곳까지 뻗어 나간 포도나무의 뿌리에 대해 듣기도 하고,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뎌내며 어떻게 포도들이 향을 응축해가는지에 대한 과정도 배우게 된다.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 룸에 자리하면, 잔에 와인이 채워지는 동안 와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또한 듣게된다. 그 포도가 자란 곳이 어디인지, 그 해의 빈티지에는 어떤 혹독함이 있었는지, 와인 메이커가 왜 하필 그날 수확을 결심했는지 등등, 그냥 마셨더라면 몰랐을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그런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듣게 되는 순간, 와인은 처음 들어설때 보았던 그저 그 와인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와인이 된다.

이것은 여러 감각 연구에서도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우리의 뇌에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는 기억과 의미의 영역을 자극하고, 이것이 미각과 동시에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 해의 포도 재배, 양조 방식, 그 뒤에 숨겨진 와인 양조의 의도등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와인 맛을 더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과도 같다.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맛보는 와인은 단순히 향과 맛으로만 분류되지 않는다. 그 한 모금을 통해 어느 특정한 공간과 계절, 그리고 포도를 수확할 완벽한 순간을 결정하기 위해 고민하던 양조 책임자의 마음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노마 코스트 산지 리토라이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에서 피노누아가 글래스에 따라지고 있고 테이블에는 와인병들이 세워져있다.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 산지의 리토라이(Littorai)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에서, 단일 포도밭 피노누아가 잔에 담기고 있다. | Photo © VinFloria

감각의 과학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때로 사람들은, 똑같은 와인을 마시면서도 더 달콤하고 과실 향이 풍부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산미가 더 강하거나 떫게 느끼기도 하는 차이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테이스팅에 집중하는 와이너리들이 아예 음악을 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 결과, 붉은빛 조명에서는 와인이 더 달콤하고, 과일 향이 더 풍부하며, 더 맛있게 느껴진 반면, 초록빛 조명에서는 같은 와인이 더 신선하고 라잇하게 느껴지는 결과를 보였는데, 그 차이는 최대 15~20%에 달했다.

그저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와이너리 테이스팅 룸의 자연광은, 물론 와인 색감을 잘 보기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모든 감각적 디테일을 왜곡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

마음의 여유

와이너리 와인 테이스팅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로 살펴 볼 마지막 요소는 와이너리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서 비롯된다.

와인을 앞에 두고, 마감 기한과 해결 안된 일들에 대한 부담과 염려로 마음이 억눌려 있다면, 와인이 지닌 복합적인 매력은 좀처럼 우리에게 와닿지 못한다.

‘인지 과부하’에 관한 연구들 역시 이를 증명하는데, 우리에게 어떤 정신적 부담이 있을수록 우리는 특히 단맛 과 복합적인 풍미 를 덜 느끼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신체의 물리적 이유도 존재한다. 침은 우리의 미각이 맛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개체인데, 불안과 정서적 스트레스는 침 생성을 담당하는 신경 경로를 억제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감소된 침 분비는 입안을 건조하게 해서 말 그대로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수요일 저녁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던 와인의 매력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인 고요한 토요일 저녁에 오픈한 와인에서 불쑥 드러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수 있다.

이는 습도가 낮은 비행기에서 와인을 마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내의 드라이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도 그저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와이너리에서는, 테이스팅에 도움될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탁 트인 언덕과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잇길을 달려 와이너리로 향하는 동안, 마음은 이미 차분하게 가라앉고, 우리의 미각은 제 역할을 다할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허브를 넣어 구운 달팽이 요리 한접시와 삼페인 한잔이 디너 테이블에 놓여있다.
알맞게 칠링된 샴페인과 허브를 넣은 달팽이 요리(Escargots à la Bourguignonne). 주말이라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는 와인 | Photo © VinFloria

와이너리에서 그랬듯이

와이너리에서 경험한 테이스팅을 집에서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 특별함의 이면에는 그날 오후의 공기, 와인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들의 목소리, 공간과 시간이 마주하며 만들어낸 단 한 번의 고유한 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집에서도 꽤 비슷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와인을 적절한 온도로 서브하는 것, 와인 특징에 알맞는 잔을 고르는 것, 코르크를 열기 전, 그 와인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 — 산지, 빈티지, 양조 방식, 그리고 생산자의 철학 — 을 미리 알아보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한 완벽한 시간을 선택하는 것.

와이너리에서 구입해 왔던 와인들, 이제 내 작은 테이블에서도 와이너리에서처럼, 같은 아름다움을 피워낼 것이다.

Wine. Flowers. The Art of Living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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