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

와인 샾에서 와인들을 둘러보다 한 와인 앞에 발걸음이 멈춰섰다. “Cuvée Chaupin(퀴베 쇼팽)”

도멘 드 라 자나스(Domaine de la Janasse)의 와인 ‘쇼팽’은 약 100여년 된 올드바인 그르나슈(Grenache) 품종 와인으로, 프랑스 남부 론의 우수한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 중 하나이다.

상당히 아끼는 와인이지만 샾에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와인이 아니라, 뜻밖의 발견이 반가워 바로 집어들고는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차 안에 쇼팽(Chaupin) 와인을 조심스레 놓아 두고는 쇼팽(Chopin)의 녹턴을 틀었다. 와인 쇼팽과 음악가 쇼팽이 한 공간에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좀 들떠왔다.

그렇게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들으며 운전하다 보니 문득 흥미로운 호기심이 스쳤다. ‘음악가 쇼팽도 와인을 좋아했을까?’ 라는.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에는 누가 있을까? 그리고 와인은 그들의 삶과 음악에 어떤 존재였을까?’


음악과 와인의 같은 언어

클래식 음악과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두 세계가 공통된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로움을 준다.

음악에서 하나의 음을 ‘노트(note)’라 부르듯, 와인에서도 플로럴, 시트러스, 흙내음(earth), 미네랄 등 개별적인 향의 요소를 ‘노트’라 말한다. 또한, 구조감(structure), 바디(body), 하모니(harmony), 밸런스(balance), 피니시(finish) 등의 용어들 역시 음악과 와인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와인, 두 세계는 ‘시간 위에서 완성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음악이 한 악장에서 다음 악장으로 이어지며 변화하듯, 와인 역시 시간에 따라 향의 레이어를 달리하며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깊이는 서두른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점 또한 같다.

음악과 와인의 이러한 공통 분모적 특징들은, 왜 와인이 오랫동안 작곡가들에게 위안이자 영감이 되어왔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피아노 건반위에 와인 코르크와 코르크 오프너가 놓여 있다.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을 알아보는 주제.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

와인이 각 작곡가의 삶에 스며든 방식은, 그들의 음악 세계만큼이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베토벤 — 끝내 마시지 못한 마지막 한 잔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 중에서도,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만큼 애틋한 마지막 장을 남긴 이도 없는 듯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와인과 인연이 깊었다. 할아버지는 궁정 음악가로 일하며 라인강과 모젤 지역의 와인을 거래했었고, 라인강변의 도시에서 자란 베토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라인 지역 리슬링 와인을 접하며 자랐다.

젊은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 뒤, 도시 외곽의 와인 마을들로 발길을 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도나우강변의 포도밭을 걸으며 곡을 구상했고, 와이너리가 운영하는 전통 식당겸 바인 ‘호이리게(Heuriger)’에서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을 즐겨 마셨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도 와인에 대한 애정은 이어져서, 지인들과 필담으로 쓴 대화 노트에는 와인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정적 속에 고립되었으나 포도밭 가까이에서 숨 쉬던 이 시기, 그는 교향곡 9번《합창》을 비롯한 위대한 명곡들을 완성했다.

임종을 앞두고 병석에 누워 있던 베토벤은 출판업자에게 그가 평생 아끼며 즐겨온 라인가우(Rheingau) 리슬링 몇 병을 보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그리고 열두 병이 담긴 와인 상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도착하게 된다. 와인을 맛보기엔 이미 너무 늦은 순간이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지막한 탄식이었다. “아깝다, 아깝도다. 너무 늦었구나. (Pity, pity, too late.)”

쇼팽 —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열정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역시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였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보르도, 토카이, 샴페인 같은 와인 이름이 자주 등장하듯, 그에게 와인은 일상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결핵이라는 병마는 그의 삶에서 와인을 빼앗아 갔고, 요양을 위해 마요르카의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 그는 와인을 한 잔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친구 퐁타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쇼팽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자조한다.

“커피도, 와인도 마시지 못하고 우유만 마시고 있네. 꼭 어린 아가씨 같다네.”

하지만 지독한 열병과 격리된 고독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쇼팽은, 이 시기에 마침내 《전주곡 Preludes Op. 28》을 완성한다.

이후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피아노 작품들을 써 내려가며, 친구에게 토카이(Tokaj) 와인 한 상자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당시 쇼팽이 즐겼던 토카이는, 그의 고향인 폴란드 귀족 사회에서도 우수한 와인으로 인정받던 와인이었다. 몸은 약해졌지만, 와인이 주는 추억과 영감은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쇼팽의 명곡들은, 이처럼 와인 잔조차 들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던 한 예술가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쇼팽에게 와인은, 서서히 멀어져 가는 삶 속에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열정이었다.

모차르트 — 샴페인과 아리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전혀 다른 결의 음악가였다. 그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활달하여 늘 사교를 즐겼으며, 곡 작업 역시 멈추지 않았다. 서른다섯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쉼 없이 타오른 불꽃과 같았다.

모차르트는 특히 샴페인을 사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낮 시간에도 샴페인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당시 샴페인은 프랑스 귀족 사회를 사로잡은 유행의 상징이었고, 트렌드에 민감했던 모차르트 역시 여유로운 점심 식사에 굴 요리와 샴페인을 곁들이는 것을 즐겼다.

그의 오페라에서 와인과 연회가 주는 특유의 흥분과 활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곡으로, 오페라 《돈 조반니 Don Giovanni》 1막에서 주인공이 부르는 아리아가 있다. 정식 제목은 ‘와인으로 머리가 달아오를 때까지(Fin ch’han dal vino)’로, 밤새 마시며 술기운을 빌려 유혹을 이어가겠다고 노래하는 곡이다.

불과 1분 20초 동안 쉼 없이 몰아치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특징인 이 아리아는, 그 속도감과 통통 튀는 음의 경쾌함이 마치 샴페인 기포가 솟아오르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샴페인 아리아’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페라 역사상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아리아는, 와인이 지닌 에너지와 활력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작곡가였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장면일 것이다.

브람스 — 포도밭에서 태어난 교향곡

와인 애호가들 중에는 가볍게 와인자체를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와인 산지를 돌아보며 포도밭과 생산자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스무 살의 젊은 브람스는 마인츠에서 출발해 뤼데스하임(Rüdesheim) 마을이 위치한 라인가우를 거쳐 뒤셀도르프까지, 몇 달 동안 라인강변을 따라 도보로 여행을 했다. 슈만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독일의 유서 깊은 와인 생산지 라인가우를 직접 거닐며 그는 리슬링 포도밭과 테루아를 익혔고, 이는 와인에 대한 그의 애정이 한층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라인가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그는 이 지역 와인을 유통하는 상인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고, 어디에 머물든 정기적으로 와인 샘플을 받아 테이스팅하며 좋아하는 와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여러 차례 방문했던 이탈리아 와인 역시 즐겼는데, 특히 시칠리아의 마르살라 와인을 향한 애정이 깊었다.

중년이 된 어느 여름, 브람스는 비스바덴에 머물며 인근 뤼데스하임의 포도원 소유주이자 뛰어난 음악가 가문이었던 베케라트 집안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포도밭과 리슬링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해 여름 완성한 작품이, 바로 훗날 그가 ‘비스바덴 교향곡’이라 부른 ‘교향곡 3번’이다.

청년 시절 그가 거닐었던 뤼데스하임의 포도밭 길은 오늘날 ‘브람스 산책로(Brahmsweg)’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전한다.

평화로운 와인 산지와 전원적인 풍경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처럼, 브람스의 음악은 화려한 겉치레보다 차분한 숲길을 사색하며 걷는 듯한 묵직한 정서와 울림을 준다.

로시니 — 미식과 음악의 예술가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 중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만큼 화려한 삶을 즐긴 사람도 드물다. 늘 사람들과 유쾌하게 어울리길 좋아하고 재치가 넘쳤던 그는, 무대 위의 음악가인 동시에 식탁 위의 예술가였다.

대표작 《세비야의 이발사》를 남긴 로시니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서른아홉 편의 오페라를 쓰고 무대를 떠났다. 이후 이탈리아와 파리를 오가며 미식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는데, 파리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던 그의 디너 파티는 고급 사교계의 상징이었다.

당대의 셰프들은 그의 안목을 존경하여, 소고기 안심과 푸아그라, 트러플을 곁들인 요리에 ‘투르네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시니 스타일을 뜻하는 ‘알라 로시니(alla Rossini)’라는 표현은 정식 요리 용어가 되어 프랑스 요리 사전 《라루스 가스트로노미크》에도 등재되어 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보존된 그의 친필 메뉴판을 보면 와인 애호가로서의 감각이 잘 드러난다. 그는 식전 샤퀴트리에 마데이라를, 차가운 미트 파이에 리슬링을, 튀김 요리에 보르도를, 메인 로스트 요리에 샴페인을 매칭한 점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풍미 자체를 즐겼던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만년에 그는 지인들과 즐기기 위해 ‘늙어서 지은 소소한 죄(Péchés de vieillesse)’라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간단한 피아노곡과 성악곡을 만들었는데, 제4권 《네 가지 전채》 《네 가지 디저트》에는 무, 앤초비, 무화과 같은 식재료 이름이 위트 있게 곡 제목으로 붙어 있다.

와인과 미식을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정작 그의 오페라 작품 속에는 와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로시니에게 음악은 예술적 완성을 다투는 엄격한 무대였고, 식탁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즐기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을 표현. 피아노 건반위에 바이올린 부분이 보이고 그 앞으로 레드 와인이 잔에 따라지고 있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의 고요한 갈망에도, 쉬지 않는 모차르트의 한밤의 작업에도, 와인은 음악가들의 곁을 지키는 존재였다. 고독 속에서는 위안으로, 창작 속에서는 불꽃으로.

그들의 작품이 시간을 넘어 숨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쓴 음표 때문만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와인을 사랑했던 한 인간의 온기가 그 음표에 담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인을 사랑한 작곡가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와인 애호가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이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여전히 음악과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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